꿈이 크는 씨앗 ‘누구나 사과 나무에 달린 사과 숫자는 헬 수 있지만 그 사과 씨 안에 들어 있는 수없이 많은 사과는 헤아릴 수가 없다’라는 말이 생각난다. 사과 속에 든 작은 씨앗 하나!. ‘ 보잘 것 없는 작은 씨 하나가 제대로 움이 트고 자라서 탐스런 많은 열매 를 정말 맺게 될까?’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. 하지만 그 작은 씨앗이 큰 일을 바로 이루어가는 생명체라는 것은 정말 놀랍지 않을 수 없다. 나는 과수원 집 딸이다. 누구보다 사과에 대한 정이 깊고 또 좋아한다.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물론 사과이고 많은 사과 종류들도 척척 알아 맞추고 빛깔만 보아도 맛을 알 정도로 조금은 사과 박사측에 낄 수가 있다. 40 중반에 가까운 내 피부가 아직도 곱다면서 아마 사과를 많이 먹어서 그런것 아니냐?며 내 어릴 때 사과 농사를 지은 집 딸임을 아는 분들은 물으시기도 한다. “정말 그런가 봐요”라고 나도 기분 좋게 대답하곤한다. 아주 어릴 땐 큰 댁에만 과수원을 했었다. 큰아버지는 욕심이 좀 많으셔서 막내 동생인 아버지한테도 많이 인색하셨다. 우리가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큰 집은 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가정이었다. 사과를 비롯한 넉넉한 것들을 함께 나눌 줄 모르는 큰 아버지가 어린 내 마음에도 큰 상처가 되었다. 아버지께서는 막내셨지만 할아버지 ,할머니를 모시고 살으셨다고하신다. 내가 태어났을 땐 이미 조부모님께서 떠나신 상태셔서 뵙지를 못해서 할아버지,할머니가 살아계신 친구들이 늘 참 부러웠다. 힘든 살림이어도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많은 힘이 되셨다고한다.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착한 며느리였다고 이웃 아주머니들이 들려 주셨다. 부모님께서 성실하신 덕분에 우리가 성장하는 중 조금씩 살림이 나아져갔고 드디어 우리도 동산 밭에 사과 나무를 심게 되었다. 어린 사과 나무에 불과 했지만 그 나무를 심을 때 우리 온 가족은 얼마나 신났었던지 모른다. 신기하게도 사과 나무는 매 년 얼마나 잘 크는지 심은 지 3년 째부터 수확을 조금씩 하게 되었다. 그 때 가장 인기 있는 사과인 후지 사과를 대부분 심었는데 그 맛은 정말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꿀 맛이었다. 넓은 밭 에 사과 나무가 커 가면서 초등학교 4학년 경부터 나도 이젠 맛있는 사과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사과 과수원 집 딸이 된 것이다. 큰 아버지가 한 두개 전해 주던 그 인색한 사과가 아니라 이젠 내가 먹고 싶은 만큼 실컷 먹고도 넘치는 과일이 되어져 있었다.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우리 큰아버지를 참 안타깝게 생각했다. 큰 어머니를 일찍 여의시고 자식들 키우시느라 악착같으셨던 것은 이해하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전답을 혼자서 그렇게 욕심내어 큰 집 식구들만 챙기셨던 놀부 아저씨로 전해져왔고 우리 아버지는 넉넉지 못한 생활에서도 착하게 부모님을 모시고 사시면서 여러 자식을 키우는 흥부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. 꿈은 예나 지금이나 시간과 함께 영글어 가는 것 같다. 해마다 사과 열매는 더욱 많이 그리고 더욱 탐스럽게 결실이 되어져갔다. 여러가지 농사 품목 중에서 사과가 가장 큰 우리 집의 수입원이 되었고 나 역시 그 사과 나무 아래서 뛰어 놀면서 늘 마음 가득 부자가 되어 있었다.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과 나무 아래 떨어진 좋은 사과들을 주어서 꼭 이웃들과 나누셨고 지나 가는 길 손들도 그냥 보내시지 않고 여름엔 시원한 물,겨울엔 따뜻한 물 한 모금이라도 드시게 대접을 하곤 하셨다. 나는 이런 마음이 따뜻한 부모님이 참 자랑스러웠다. 분명 박씨를 든 제비가 우리 부모님께 찾아 올 거란 기대를 항상 하고 있었다. 시간이 흘러 우리가 많이도 성장을 했다. 사과 나무의 소출이 나아져 가면서 우리들의 생활도 조금씩 나아져갔다. 부모님께 분명 제비가 날아 와서 박씨를 주었다는 생각이 내겐 들었다. 그 사과 씨앗이 다름 아닌 우리 가정에 날아 온 행운의 박씨 같은 것이었다. 농사짓는 시골이라 가난한 살림과의 싸움에서 우리 가정을 이기게 한 것이 바로 이 사과 나무였기에 나는 늘 사과만 보면 사랑과 감사와 특별한 정을 느끼게된다. 이곳 캐나다에 와서도 나는 사과를 늘 즐겨 사먹는다. 코스코에 가면 각양각색의 싱싱한 많은 과일들이 즐비하다. 한국에서 안 먹어 보았던 맹고와 씨 없는 포도와 블루베리등과 한국서도 먹었지만 그 때와 또 다른 맛으로 전해져 오는 배를 비롯한 모든 싱싱한 것들 중에서도 나는 단연 사과를 제일 좋아한다. 사과는 내 몸에 좋아서 먹는 과일이라기 보다는 정말 오랜 친구를 만나는 정다움과 반가움으로 내겐 전해져온다. 우리 과수원에서 농사지어 따먹던 그 꿀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아삭아삭 맛있는 후지 사과 맛은 아니어도 넉넉지 못했던 어린 시절과 모든 면에 풍성한 지금의 나를 연결해 주는 아름다운 다리처럼 사과는 내게 정말 특별한 사랑으로 늘 전해져온다. 가을에 한 번씩 이곳서 그리 멀지 않은 외곽 사과 단지로 아이들과 사과 따기를 하러 가곤한다. 입장료를 내면 그 안에서 먹는 것은 실컷 먹고 나올 때 농장에서 준 봉지에 한가득 담아 올 수 있는 넉넉함이 있는 과수원 나들이를 즐거움으로 삼곤한다. 작년에 막내가 3살인 가을 날 사과 따러 갔다가 “엄마,하나님이 이 사과 따지 말라고 했잖아요”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던지 모른다.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들었던 때라 아이는 선악과를 이 사과와 연결이 되었던 것 같았다. 혹시 뱀이 사과나무 위에 감겨 있지는 않나도 염려하면서 엄마가 들려 준 성경 이야기를 정말 정확하게 적용하면서 말하는 아이를 보면서 사과 나무에 관련된 재미있고 유익한 많은 이야기들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. 내가 예수님을 만 난 것이 내 생의 가장 큰 가치관의 변환점이 되었기에 하나님 은혜를 늘 감사드리게 된다. 그리고 내 어린 시절 어려운 우리 가정의 삶의 전환점이 되어 점차 넉넉함으로 옮겨 가게 해 주었던사과를 생각할 때도 정말 고마움이 절실히 전해져온다. 가뭄이 들 때면 강변의 물을 긴 호스로 끌어 올리느라 나는 그 노오란 고무 호스가 사과 나무에 걸리지 않게 뛰어 다니면서 옮겨 주었고 수시로 약을 칠 때마다 그 때 역시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약 호스가 나무에 걸리지 않도록 신나게 뒤 따라다녔던 기억이 새롭다. 나를 닮아서인지 유독 사과를 좋아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나는” 사과는 아침엔 금메달,점심엔 은메달, 저녁엔 동메달이란다”라는 말을 하면서 가능하면 효능이 더 좋은 아침에 많이 먹으라고 권하곤한다. 그 사과 밭을 누비시던 아버지가 많이도 그립다. 어느 사이 우리와 사시는 곳이 다른 천국에 계시지만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. 사과를 자식 키우듯 가꾸셨던80세를 맞으신 어머니! 그 사과 곁에서 얻으신 에너지 덕분으로 늘 건강하신 어머니로 인해서 아버지의 그리움에 위로를 얻는다. 어머니께서 언제까지 더욱더 건강하시면서 오래오래 사시길 기도드린다. 자식들에게 꿈의 씨앗을 심어주신 아버지,어머니가 늘 감사하다. 어린 사과 묘묙을 심으시면서 우리들에게 꿈을 담아 주셨던 부모님의 은혜가 가슴 가득 감동으로 전해져온다. 그 사과 속에 들었던 작은 씨앗에 불과했던 우리 7남매가 이젠 정말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열매들을 다양한 분야에서 주렁주렁 맺어가고 있음을 볼 때 작은 씨앗 속에 들어 있던 생명을 알고 위해서 기도해 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었던 부모님과 가족과 친척과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게되고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이젠 나도 함께 주변에 나누어 가면서 내 주변에 생명을 갖은 내 도움이 필요한 작은 씨앗들이 어디에 있는지? 그리고 어떻게 도와주어야될지?를 관심있게 돌아보아야겠다. 아침에 식탁에 사과를 올리면서 아련한 추억과 사랑으로 전해져 오는 나의 사과 이야기를 잠시라도 적어두고 싶었다. 이 글을 쓰면서 가슴 깊숙이서 전해져 올라 오는 감사가 내 눈을 통해 흠뻑 흘러 내리고 있다. 꿈이 담긴 씨앗이 꿈을 이루어가는 소리를 들어면서………… 2005년 11월 24일 목요일 눈 쌓인 넉넉한 오전에.김수남. |